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88 서울 올림픽/유치 과정 (문단 편집) == 국내외적 여러 시련 및 정국 혼란 == 분단 상황에 대한 우려를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올림픽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극복했지만, 북한의 방해는 여전히 심했다. 이미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대한민국|남한]]의 수도 [[서울특별시|서울]]에서 개최될 경우 분단이 고착화된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11210020920200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11-21&officeId=00020&pageNo=2&printNo=18503&publishType=00020|북한의 서울올림픽 개최 비방]]] '''일본을 지지했던 북한'''은 [[1987년]]까지 뜬금없는 '''공동 개최론'''을 주장하며 대회 명칭을 '''[[평양시|평양]]-[[서울특별시|서울]] 올림픽'''으로 해야 한다는 무리한 주장을 서슴지 않았고[*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88올림픽의 남북 분산개최를 북한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도 사회주의 국가의 대회 참가 명분을 제공할 목적으로 이를 북한에 제안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나 당시 IOC의 사마란치 위원장은 1984년 9월에 방한하여 한국의 고위인사와 자리를 통해 만나는데 이때 남한이 일부 종목의 남북 분산 개최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자 "북한은 결코 이 제안을 수락하지 못할 것"이라며 대답하면서 "한국은 '안 된다'고만 이야기하지말고 'IOC가 공식적으로 제안해올 때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용의가 있다.' 정도로만 답하면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LA 올림픽 보이콧 이후 서울 대회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단 한 가지 장애물이 북한"이라며 "그래서 한 가지 핑계를 찾고 있는데 만약 북한이 2∼3개 종목 개최를 수락하지 않으면 서울에 갈 구실이 되는 것이다." 라고 덧붙여서 설명했다.[[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1&aid=0010730237&date=20190331&type=1&rankingSeq=4&rankingSectionId=100|참고#]]], 남측에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가 60만 명에 달한다고 방해 선전을 하는 등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https://youtu.be/69BC8pD2KPg|#]] 이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은 남한에 대해 "헐벗고 굶주리며 거리에서 사람들이 미제가 먹다 버린 것까지 주워 먹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곳"이라는 거짓 비방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북한도 올림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상황인지라 "헐벗고 굶주려 쓰레기통을 뒤진다는 나라에서 올림픽?" 이라 의문을 들 수 있어서 이런 발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하자 북한은 대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여 올림픽보다 더 규모가 컸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나, 해당 대회를 무리하게 개최하여 [[북한의 80년대 3대 실정|바로 직후 떠안은 상황과 후폭풍]]은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서울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이후 북한은 아주 과격한 행보를 보이게 된다. 특히 1986년에 열리는 [[서울 아시안 게임]]을 방해하고자 아랍계 테러리스트에게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를 사주하였고, 공항 청사 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 테러로 5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 올림픽 때 공항 경찰이 비상사태에 들어가기에 이른다.] 또한 북한은 급기야 올림픽 [[보이콧]] 운동까지 시도하기에 이르는데. 앞에 나온 사례 정도는 사실 그냥 단순 애교 수준이었고, 그간 북한의 공작 활동들 중에서도 'KAL기 폭파 사건'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과 사실 그 이전이었던 1983년에 직접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고자 시도했던 현재 미얀마인 과거 버마에서 발생했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와 같은 가장 유명했던 사건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북한과의 관계와 테러 위협을 이유로 소련과 인도에서 불거진 올림픽의 [[아테네]] 영구 개최설 등으로 잠시 올림픽 개최가 흔들리기도 했다. 특히 [[6.10 민주 항쟁]]의 와중에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이유 삼아 [[로스앤젤레스|LA]]와 [[베를린]] 등에서 유치권을 가져오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만약 한국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날 시에 올림픽 장소변경을 고려했을 정도로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뻔했다. 이처럼 당시 한국의 심각했던 국내외적 상황은 IOC에서도 1988년은 어렵고 1996년으로 연기하자는 말도 나왔는데 당시 노태우가 IOC로 가서 문제없다는 연설을 하고[* 노태우는 이후 1988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걸 자랑하듯이 홍보 만화에서 큼직하게 다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외교적으로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노태우가 비장하게 가서 연설하길 "1988 올림픽이 서울에서 못 열리면 잠실종합경기장을 IOC 위원들 무덤으로 쓰겠다"고 연설했다.] 이후 [[6.29 선언]]으로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면서 예정대로 1988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 또한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인 1987년에 발생한 [[6.10 민주 항쟁]]에서는 당시 [[명동성당]]에 민주화 시위대가 정부의 공권력을 피해 주둔해 있었는데 또한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이러한 정부의 공권력 투입에 그 유명한 '''"내 뒤에는 신부, 수녀, 학생들이 있다. 군대가 들어오고 싶다면 가장 먼저 나를 밟고, 그 다음으로 신부들을 밟고, 그 다음으로는 수녀들을 밟은 후에야 학생들을 만나라."'''라는 강경한 저항을 하며 직접 맞선다. 이처럼 만약 정부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고 가정한다면 결국 서울 올림픽은 3번 연속으로 반쪽 올림픽이 될 뻔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군다나 이 올림픽은 전두환의 최대 역작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의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대회 행사인데 만약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자기가 불러온 복을 자기가 걷어차 버리는 상황이 될 뻔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민병돈]] 중장은 정부의 군대 출동 명령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던 보안사령관 [[고명승]] 중장에게 밝히는데, 이처럼 군인 세력마저도 폭력 사태가 일어나 자국에서 처음 치뤄질 올림픽을 무위로 그르치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이는 결국 특전사의 무력진압사태를 사전에 봉쇄하고 큰 사건과 사고 없이 이후 [[6.29 선언]]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로서 작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